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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을 종잡을 수 없던 비구름을 요리조리 피해 연꽃과 수련을 보고 왔다. 빗물로 말갛게 세수한 듯 하얀 얼굴의 백련, 곱디고운 홍련, 왈츠를 추는 요정 같은 노랑어리연…. 진흙에서 피어나 맑은 기운을 전하는 연꽃이 지금 절정이다. 앞으로 보름간 경기 양평 세미원에 가면 연꽃과 수련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큰 쟁반 잎에 왕관 모양 꽃이 특징인 빅토리아 수련도 8월 초부터 꽃을 피울 예정이다. 세미원에서 차로 30분 더 달리면 도달하는 근사한 복합문화공간 이함캠퍼스 연못에도 연꽃이 피었다.
이른 아침 고요한 시간에 만나는 연꽃은 명상적이다.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연꽃과 수련 감상 명소, 세미원
세미원 입장 시간인 오전 9시에 맞춰 도착하니 이미 관람객 여럿이 매표소 앞 연못가에서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다홍색 별 모양 겹꽃 수련이었다. 이 수련 이름은 ‘세미 1호’다. 태국의 한 수련 육종가가 2019년 세미원이 경기도 지방정원 제1호로 지정된 걸 기념해 기부한 품종이다. 세미원은 기증받은 괴근(塊根·덩이뿌리) 한 뿌리를 재배 증식해 2022년 국립종자원에 품종 등록했다. 올해 세미원 개원 20주년을 기념해 세미 1호 20개가 정원 입구에 배치됐다. 산림청 산하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 선정한 2024년 올해의 정원식물이기도 하다.
요염하기도 앙증맞기도 한 별 모양 겹꽃 수련 ‘세미 1호’.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많은 이들이 연꽃과 수련의 차이점을 궁금해 한다. 연꽃은 수면에서 잎을 일으켜 세우는 정수(挺水)식물, 수련은 잎이 수면에 뜨는 부엽(浮葉) 식물이다. 알고 지내는 숲 해설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쉽게 기억하세요. 목련은 나무에 피는 연꽃, 수련은 물에 피는 연꽃. 수련은 꽃과 잎이 물에 바짝 붙어 있어요.” 머리에 쏙 들어오는 설명이지만 알아 두어야 할 게 있다. 수련의 ‘수’는 물 수(水)가 아니라 잠잘 수(睡)다. 아침 일찍 꽃잎을 열었다가 오후 세 시 이후엔 잎을 오므리기 때문에 잠드는 것 같다고 수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후부터 꽃잎을 닫는 건 연꽃도 마찬가지다. 신비로운 연꽃과 수련은 아침을 사랑하는 부지런한 자들을 위한 꽃인가보다.
수면에서 잎을 일으켜 세우는 연꽃.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갈라진 잎이 물 위에 뜨는 수련.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세미원이 8월 16일부터 9월 1일까지 여는 ‘빅토리아 수련 문화제’는 빅토리아 수련을 실컷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귀한 꽃이라 예년엔 10개체 등을 전시했는데 올해엔 무려 150개체를 선보인다고 한다. 빅토리아 수련은 영국 식물학자 존 린들리가 아마존 유역에서 처음 발견해 영국 빅토리아 여왕 이름을 붙였다. 큰 잎과 줄기에 가시가 있어 ‘큰가시연꽃’으로도 불린다. 다른 수련과 달리 밤에 꽃이 피기 때문에 ‘밤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있다. 송명준 세미원 대표는 “지금은 지름 70cm 정도인 빅토리아 수련 잎이 한 달 내로 150cm로 커져 장관을 이룰 것”이라며 “기후 위기로 연꽃 개화기가 점점 짧아지고 7월 집중 호우로 관람객이 더 많이 찾아올 수 없던 것이 아쉬워 빅토리아 수련 문화제를 역대급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세미원의 빅토리아 수련 연못.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빅토리아 수련의 한 종류인 빅토리아 크루지아나. 세미원 제공
세미원은 한국 역사와 스토리를 곳곳에 담은 ‘K가든’이다. 한반도를 형상화하고 장독대에서는 분수가 솟아오른다. 바닥에는 빨래판 모양 블록이 깔려 있다. 마음을 씻으라는 뜻이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쩌면 연꽃보다 더 많은 관람객을 마주친다. 정호승 시인의 시 ‘연꽃 구경’이 떠오른다. 시인은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고 했다.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 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연꽃은 우리 인간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연꽃의 맑고 고운 기운 앞에서 삶을 돌아보게 된다.
연꽃들도 사람 구경을 할까.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세미원의 장독대 분수.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세미원에 가야 할 이유는 또 있다. 한때 침수됐던 세미원 배다리가 보수공사를 마치고 올해 4월 다시 개통돼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잇는다. 1795년 조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묘인 화성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정약용 등에게 지시해 한강에 설치했던 주교를 재현한 다리다. 선박 44척을 잇고 오방색 깃발을 매단 배다리를 건너면서 효심이 극진했던 왕의 행렬을 상상해보고, 두물머리 명소인 어느 핫도그 가게에서 4000원짜리 핫도그를 사 먹는다. 밥 생각이 떠날 정도로 속이 든든해진다.
세미원에서 배다리를 건너 두물머리에서 먹는 지역 명물 핫도그.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보수 공사를 거쳐 올해 4월 재개통한 배다리. 세미원 제공
●문화를 담은 비밀의 정원, 이함캠퍼스
세미원에서 마음을 씻었다면 양평군 강하면에 있는 이함캠퍼스(면적 3만3000㎡)로 가 보자. 1978년 단추 회사 두양을 설립해 평생 모은 재산 600억 원으로 2013년 두양문화재단을 설립한 오황택 이사장(75)이 2022년 연 복합문화공간이다. 오 이사장은 2015년에는 100억 원을 들여 서울 북촌에 청년 인문학교 건명원도 세웠다.
이함캠퍼스 .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20여 년 정원을 조성해 2년 전 문을 연 이함캠퍼스 전경.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함캠퍼스는 당초 지난달 30일까지였던 ‘사물의 시차’ 전시가 호응을 얻자 10월 27일까지로 전시 기간을 연장했다. 오 이사장이 수십 년 수집한 20세기 디자인 가구 110여 점을 모은 전시다. 르 코르뷔지에, 장 프루베, 론 아라드를 비롯한 현대 디자인 거장들의 가구를 보고 있으면 이런 눈 호강이 따로 없다.
이함캠퍼스의 ‘사물의 시차’ 전시.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오 이사장의 조선 목가구 수집품을 전시하는 ‘선, 면, 결의 조우’라는 전시도 18일 시작해 8월 25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함캠퍼스에서 만난 오 이사장은 “수십 년 전 우리 고가구를 사 모으다가 서양 디자인 가구로까지 수집 분야가 확대됐다”며 “조선 목가구는 제각각 특별한 아름다움을 갖지만, 특히 사방탁자가 풀어내는 비례의 미는 현대 조형미의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함캠퍼스의 ‘선, 면, 결의 조우’ 전시. 이함캠퍼스 제공.
이함캠퍼스 정원이야말로 ‘시크릿 가든’이다. 정원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아담한 키의 배롱나무가 이 계절이 여름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오 이사장은 1999년에 미술관을 짓고도 오랜 세월 정원을 가꾸느라 2년 전에야 이함캠퍼스를 열었다. 20여 년 전 심은 가느다란 메타세쿼이아는 이제 숲을 이뤘다. 조경은 오 이사장과 아내인 전은숙 두양문화재단 이사가 직접 담당한다. 남편은 소나무와 돌 같은 전통 조경, 아내는 카페 주변의 영국식 정원 조경을 나눠 맡는 식이다.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내 안목대로 한다”는 오 이사장의 수집 원칙에 따라 나무와 돌을 전국에서 공수해 왔다. 그에게 나무를 키우는 일과 인재를 키우는 일의 공통점을 물었다. “나무는 어릴 때부터 전정(剪定·가지 정리)해주면 근사한 수형(樹形)을 이룰 수 있어요. 너무 커버리면 전정이 힘들어져요.”
이함캠퍼스 정원의 배롱나무.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함캠퍼스 카페 뒷쪽의 정원. 메타세쿼이아 그늘 아래 쉴 수 있는 해먹이 인기다.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함캠퍼스 카페의 창가에 앉으면 노출 콘크리트 소재 미술관 건물을 배경으로 연못이 펼쳐진다. 연못 중앙에 연꽃이 피어 있다. 황후 느낌의 세미원 연꽃 군락에 비하면 가녀린 꽃이지만 왠지 마음이 간다.
이함캠퍼스 카페에서 본 미술관과 연못.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함캠퍼스 연못의 연꽃.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연꽃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국민이 좋은 것을 많이 접해야 우리 사회 수준이 높아진다”는 오 이사장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양평으로 떠났던 연꽃 구경을 마치며 생각해봤다. ‘나는 오늘 하루 상념을 내려놓고 한 송이 연꽃이 되어 보았을까’.
양평=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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