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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1962년 등반 중 구릉에 올라 찍은 사진. 박철암 선생은 이를 6,700m 무명봉의 '등정' 사진으로 소개했다.


히말라야 등정 시비는 국내 산악계의 오랜 주제다. 1970년 네팔의 추렌히말(7,371m) 등정 시비를 필두로 잊을 만하면 터지곤 했다. 고산등반 열기가 가라앉은 요즘도 현재 진행형이다. 필자도 그런 문제를 지적해 왔다. 월간山 칼럼을 통해서도 몇 차례 썼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근거와 당위가 충분하다 해도 실명을 거론하며 쓴소리 하기는 불편하다. 실제로 여러 번 거센 비난으로 되받아야 했다. 손해 본 일도 없는데 필자는 왜 걸고넘어지려 했을까.
서로 엇갈린 내용의 보고서
잠시만요 일본어 근의 화근은 본지 1월호 칼럼(한국 산악계의 고질적 거짓말, '정상 올랐다')에서 비롯됐다. 칼럼은 이런 내용이다. 한국 최초 히말라야 원정대였던 1962년 고故박철암 선생(1918~2016)의 경희대 다울라기리 탐사대부터 허위 등정 보고가 시작돼 숱하게 반복되었으며, 그것은 등반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기업·소속 집단이 등정자를 영웅시하면서 이득을 바꿔드림론 dti 취해 왔던 구조 때문이고, 따라서 등반의 결과보다 과정에 주목하는 산악계 공론장이 숙성돼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칼럼이 나간 뒤, 박철암 선생 관련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쪽 사람들이 필자의 칼럼으로 인해 분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두 명이 필자 집 앞까지 찾아와 밤늦은 시각 카페에 앉아 격론을 벌이기까지 했다. 필자는 칼럼에서 박 기아차 할부 프로그램 선생이 2010년대 와서야 1962년 당시 정상에 오르지 못했음을 밝혀서 '커밍아웃'했다고 썼다. 이들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맞섰다.



1962년 원정의 공식 목적은 '다울라기리 2봉(7,751m) 등반을 위한 진입로를 찾기 위한 정찰'이었다. 그런데 원정대는 인근에 있던 '6, 근저당설정 700m의 무명봉(이름 없는 산)'도 등반했다. 이듬해 박 선생이 집필·출간한 보고서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군의 탐사기(1963)>에 당시 등반 과정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이렇게 얼마를 반복하였는지 갑자기 시야가 터졌다. 나는 20발자국을 더 셀 필요가 없었다. 정상에(6,700m의 피크) 올라선 것이다. 무한한 감격과 피로가 겹쳐 한국주택공사전자조달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다음에는 송대원과 셰르파가 올라왔다. 송대원도 쓰러졌다. 그리고 둘이서 부둥켜안았다. 북받쳐 오르는 감격의 눈물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품에 간직하였던 태극기와 교기, 그리고 네팔기를 피켈에 매어 높이 쳐들었다. 눈물이 또 흘러내렸다. 나는 일망무제 서녘 하늘 멀리 아득한 조국 하늘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드디어 우리는 승리하였노라!'
원정대가 6,700m 무명봉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은 당시 국내 일간지를 통해서도 발표됐다. 그런데 박 선생은 잡지 <사람과 산> 2011년의 연재, <부산산악포럼 2013년호> 기고문, 유고집 <박철암의 산과 탐험(2019)> 등에서 당시 정상 등반 과정을 아래와 같이 정반대로 서술했다.
'나는 정상 쪽을 바라본 후 경악했다. 그곳에는 무너질 것 같은 청빙의 20m 오버행 빙벽이 우리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 "으악! 흑! 흑~!" 빙벽을 바라보던 송대원이 갑자기 통곡하기 시작했다. (…)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미루어 짐작건대 그동안 온갖 고난을 겪으며 이곳까지 올랐건만 정상을 목전에 두고 빙벽 때문에 등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원통함에 터진 절규였으리라. 나도 사활을 걸고 준비한 지난한 과정이 오버랩되면서 송대원과 함께 "엉엉!" 울고 말았다. 울음을 그치고 정신을 차린 우리는 빙벽을 다시 보았지만 힘이 빠져서 도저히 붙을 용기가 없었다.



박철암 선생의 유고집.


태극기를 들어야 했는데 능선에서는 태극기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능선상에 있던 한 구릉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사다에게 고도가 얼마냐고 물으니 6,700m라고 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 든 생각이지만 그때 우리는 빙벽을 올랐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이 글 말미에 박 선생은 이 원정을 총평하면서 '우리는 비록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한국 히말라야 도전사의 선구자적 디딤돌이 된 것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썼다. 박 선생의 1963년 기록과 2010년대 기록에 대해, 필자를 찾아온 두 사람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❶ ‌1963년의 보고서와 2010년대 기록이 사실관계가 다른 것은 없음. 1963년에 생략된 부분이 2010년대 기록에 추가된 것일 뿐임.
❷ ‌2010년대 기록에서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는 '구릉'은 원래 계획한 무명봉을 못 오르게 되었으므로 현장에서 변경해 지정한 '제2의 등반 대상지'로서, 그곳에 다다랐으므로 '정상' 등정임. 당시 원정대는 정찰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대상지를 현장에서 판단해 결정했던 것이기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음.
❸ 따라서 '허위 등정 보고'가 아님.
❹ '커밍아웃'이란 표현은 모욕적임.



2022년 재간행된 '1962년 원정보고서'. 대원들이 투쿠체 빙하를 오르는 모습을 표지사진으로 사용했다. 박 선생은 이 빙하 왼쪽에 정상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 필자의 반박은 이랬다
❶ ‌2010년대 묘사에 따르면 그 '구릉'이란 등반 대상지로서의 '정상'이 될 수 없는 수준임.
❷ 즉 원정대는 목표한 정상은 물론 그 어느 '정상'에도 오르지 못했음.
❸ 따라서 1963년 보고서의 등정 보고는 허위임.
❹ 그걸 정정하려고 했으므로 커밍아웃임.
❺ ‌'커밍아웃'이란 용기 있는 행위로서,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아야 할 행위임.
❻ ‌다만 과거에 '등정'으로 보고했던 이유를 박 선생은 여전히 설명하지 않았음.
그밖에도 필자는 그들에게 여러 정황을 들어 논박했다. 1963년 보고서 속 '감격의 눈물'과 2010년대 기록의 '원통함에 터진 절규'가 같은 등반가의 정서에서 한날한시에 함께 존재할 수는 없으며 1963년 보고서에서 정상 사진으로 제시된, 뒤에 더 높은 설사면을 두고 태극기를 들고 찍은 상반신만 노출된 사진을 정상 사진으로 보기는 어렵고 그런 방식의 사진 촬영이 허위 등정 보고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방식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등산 역사가 故손경석 선생은 <한국등산사>(2010)에서 '오늘날 증거주의의 현실에서 보면 어느 정도 미흡함이 있어 아쉽다'고 의혹을 제시했는데, 아마도 그 사진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국내 히말라야 등반사를 집대성한 <역동의 히말라야>(1998)의 저자 남선우도, 박 선생의 뒤늦은 회고를 접하고는 등산사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한편, 히말라야 등반 지리에 정통했던 산악인 故김창호(1969 ~2018)는 여러 차례의 다울라기리산군 등반과 답사를 통해 1962년 원정대가 시도한 '6,700미터 봉우리'가 실제 어떤 산이었는지 연구했고, 결과적으로 그 산이 투쿠체 서봉(6,848m)이었다고 특정해 냈다. 이 봉우리는 1969년 스위스 원정대가 공식 초등한 것으로 국제산악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창호가 2009년 아래에서 바라보며 촬영한 투쿠체 서봉 전경.


이상을 요약하면 사실관계는 이렇다
첫째 ‌
1962년 원정대는 그 어떤 봉우리 정상에도 서지 못했다. 한국 등산사에 그간 기록되어 있는 이 원정대의 '6,700미터 무명봉 등정'은 수정되어야 한다.
둘째
‌박 선생은 허위로 등정을 보고했다. 따라서 이 원정은 국내 히말라야 원정 1호일뿐만 아니라 허위 등정 보고 1호이기도 하다. 국내 히말라야 등반사가 허위 등정 보고의 역사와 궤를 함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
박 선생은 미등정임을 밝히면서도 그간의 등정 보고가 허위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이는 여전히 혼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박철암 선생은 뼛속부터 등반가였다
사실관계를 넘어 의미를 판단해 보자. 질문 아홉 개를 차례로 따져보겠다.
① 박철암 선생은 누구인가?
국내 등반사·탐험사에 한 획을 그은 명실상부 모험의 아이콘이다.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원정대를 조직했고 한국인 최초로 5,000m, 6,000m 고지를 밟았다. 국내 최초 8,000m 원정대인 1971년 로체샤르(8,383m) 원정대를 대장으로 지휘했다. 선생의 모험적인 산악활동으로부터 후대는 많은 혜택을 받았다. 히말라야 진출 그 이상을 꿈꾸게 됐다.
② 1962년 원정대가 6,700m 무명봉(투쿠체 서봉)의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지적은 박 선생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1962년의 히말라야 원정은 그 자체로서 한국 탐험사에 길이 남을 선구적 성취다. 그 당시 국내 언론에서도 무명봉 등정보다는 세계 산악계의 이목이 쏠렸던 다울라기리 2봉의 등로를 성공적으로 정찰하고 돌아왔다는 점에 찬사를 보냈다.



1963년 원정보고서에 수록된 지도. 원정대가 시도한 6,700m 봉우리가 삼각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투쿠체 서봉(6,848m)으로 여겨진다.


③ 박 선생이 등정에서 미등정으로 '커밍아웃'했다고 재차 밝히는 게 선생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일까?
그런 인식은 등반가 박철암의 내면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 피해당한 이도 없는데 커밍아웃은 과도한 결벽증이었을 뿐일까? 그러나 선생의 여러 글을 읽어보면, 다울라기리 2봉 등반 루트의 발견보다도 그 무명봉의 정상에 몹시 오르고 싶었던 게 느껴진다. 들소처럼 밀어붙였으나 실패했다. 조금만 더 해봤으면 어땠을까, 뿌듯함 속에서도 아쉬움이 두고두고 밴 추억으로 선생에게 남았다.
④ 박 선생은 왜 뒤늦게라도 '미등정'을 밝혀야 했을까?
그는 미등정을 밝힘으로써 그런 공감을 기대했다. 못 오른 통한을 나누고 싶었다. 선생은 국위선양의 부속이 아니라 뼛속부터 등반가였기 때문이다. 정상이 아니라 '정상에의 염원'이야말로 등반의 가장 가슴 뛰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서 후대는 선생과 공감한다. 등반의 체험이란 게 그때도 그랬다는 것을, 선생의 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선생의 젊었던 시절 모험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선생을 어떤 신화 속 영웅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누구나와 동류의 등반가로 기억하게 된다. 그의 가슴 뛰는 정상에의 욕구가 이 시대 등반가들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온다. 선생을 무오류의 인물로 그리는 것은 반대로 그를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공감과 배움이 아닌 딱딱한 조각상에 대한 외경이다. 박제된 영웅은 결국 외면되고 만다.
두 건의 허위 등정 보고
더 생각해 보자.
⑤ 박 선생은 왜 애당초 등정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여기서 '참/거짓의 도덕률'을 들이밀기 전에 먼저 등반가의 심리에 주목해 보자. 허위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으로 필자의 사례를 들겠다.



2002년, 텐트피크 정상이 아닌 능선 위에서 '정상' 사진을 촬영했다. 왼쪽이 필자.


나는 허위 등정 보고를 두 차례나 했다. 2002년 네팔 안나푸르나 산군에 있는 텐트피크(타르푸출리, 5,663m)와 2012년 에베레스트 옆에 솟은 로체(8,516m)에서다.
첫 번째, 텐트피크는 필자의 첫 해외 등반 대상지였다. 필자를 포함한 정상 등반팀 3명과 셰르파 1명은 이미 오후가 된 시각에 가파른 설벽을 어렵사리 등반해 정상과 연결된 능선에 올라섰다. 뒤따라 올라온 셰르파 가이드는 올라선 바로 그 지점이 정상이라고 했다.
저만치 높이 솟은 봉우리가 정상이 아니냐고 물으니, 그는 이 산 이름이 '텐ten 피크', 곧 '10개의 봉우리'라며, 여기부터 저기까지 솟은 둔덕들이 총 10개로 '모두가 정상'이라고 말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믿었다. 믿음은 기쁨과 동의어였다. 그게 얼토당토않은 궤변이었음을 인정하기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기쁨의 잔상이 가시고 난 뒤에나 가능했다.
두 번째는 필자가 대장이었던 원정대였다. 로체 정상 등반을 마치고 내려온 후배를 2캠프(6,450m)에서 맞았다. 후배는 낙심한 표정으로, 정상 10~15m 아래에서 돌아내려 왔다고 털어놓았다. '셰르파에게 의지해 오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등정을 포기했단다.



텐트피크 능선에서 정상을 올려다본 사진. 필자 일행은 이 사진을 찍은 지점 근처를 정상으로 여기고 하산했다. 사진 프라즈왈 모한


필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정도면 오른 거지"라며 정상 등정을 공표했다. 그러나 10m는 '정상으로 인정해 줄 만한 거리tolerance zone' 밖이다. 그때 필자는 그런 것을 자세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믿음은 기쁨과 동의어였다. 보는 이도 없고 누구 해 끼치는 일도 아니지 않나. 기쁨의 쾌락에 안주하며 더 이상의 판단을 멈췄다.
두 원정 모두 필자가 소속된 서울대농생대산악회에서 주관했다. 필자는 2023년 발간된 산악회 기록집 <산행 60년>에서 '로체 정상 등정'은 허위였음을 소상히 밝혔다. 마음에 담아 둔 거짓이 바늘처럼 종종 살아나와 찔러댔기 때문이다. 다만 사실을 밝힌 뒤에도 이렇다 할 갈등이나 논란은 없었다. '등정'에 따르는 축하, 환희, 이득은 모두 실컷 취取하고 난 뒤였다. 그걸 되돌려줄 길은 없었다.
"자신을 팔아먹었으니 죄인"
⑥ 판단을 멈추게 하는 그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정상에만 집착하게 하는 힘은 과연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여기서 등반가 개인의 내면만 계속 들여다보면 알쏭달쏭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다. 히말라야 14좌든 국내 100대 명산 같은 종류든, 과도하게 정상에만 집착해 온 이유를 개인적인 일탈이나 '비뚤어진 문화'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더 이상의 탐구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대신 등반이 이루어지는 마당을 제공하는 사회관계와 구조적 환경의 퍼즐을 맞춰봐야 한다. 그러나 박 선생이 정상에 왜 그토록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지, 당시 사회상이 어땠으며 산악인들은 히말라야에서 무엇을 이루도록 요구되었는지 우리는 잘 모를 뿐 아니라 사실 관심이 없다. 왜 박 선생은 집을 팔고 가족을 기도원에서 지내게 하면서까지 그토록 원정대를 꾸리고 싶었을까? 원정 출발일을 8월 15일로 잡았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구릉에 올라서서라도 태극기를 들어야 했던 비장한 '애국심'은 과연 어떻게 생겨났나? 이런 점을 언급하는 이를 아직껏 보지 못했다.
정상은 모든 등산가의 목표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지 못해도 괜찮고, 또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주고 공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했다. 국위선양에의 기대, 성과에 대한 압박이 지배적인 환경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을 존중하고 대화하는 토양이 박약한 우리 시민 사회 일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게 등반가의 감정 구조로 내면화됐다. 등반 내용보다도 정상에서만 희열을 찾는 감정 구조다.
이제 핵심에 근접했다.
⑦ '정상에 섰다'는 거짓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시대가 그랬으니 면죄부를 줘야 할까, 아니면 시대와 사회상을 불문하고 똑같이 단죄해야 할까.
시대상과 무관하게 허위 등정 보고는 주위에 해롭다. 주된 피해자는 동료·후대 등반가들이다. 등반 전체가 폄하된다. 대중은 등반을 영웅이 되어 보려는 속임수쯤으로 여기고, 묵묵히 오늘도 산과 벽을 오르는 무수한 등반가들의 진위는 오해된다. 암벽등반은 다쳐서 세금 축내는 기행으로 비치고, 허가받아야 하는 통제 대상이 된다. 프리솔로 등반은 공감은커녕 국위선양 아니면 '관종(관심 종자의 줄임말)' 양극단으로 갈려 이해된다.



2012년, 로체(8,516m)를 배경으로 2캠프(6,450m)에서 대원들과. 왼쪽이 필자.


신뢰와 공감 필요하다
⑧ 정상에 올랐다고 거짓말한 이들은 단죄 받아야 할까?
필자의 앞선 칼럼에 달린 댓글들을 읽어봤는데, 대부분 '세상에는 사기꾼이 많다'는 식이었다. 글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이해였다. 남을 속여 돈이라도 빼앗았다면 단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등반으로 얻는 이득은 그리 단순치 않다.
인간은 '거짓은 나쁘다'는 명제를 선택적으로 적용한다. 정탐꾼을 숨겨준 라합을 성경은 선인으로 묘사한다. 참/거짓의 도덕률은 피아彼我의 편 가르기 규칙으로 쉽게 쓰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타인을 표적과 교훈 삼아 올바른 말만 늘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 '좋은 등반가'와 '나쁜 등반가'를 가르는 기준만 세우고 끝나기에 십상이다.
누구는 나쁘고 누구는 좋다는 기준은 마침내는 공허하다. 결국 '우리'와 '그들' 사이를 가르는, 오직 그것뿐인 잣대로 봉사할 뿐이다. 그간 무수한 등정 시비에서는 대개 참/거짓의 도덕 잣대 들이밀기에만 그쳤다. 이런 단순한 잣대로는 사람들이 위험한 등반을 대체 왜 하고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숙고하는 데에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다.
단죄보다는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일이다. 허위 등정 보고로 인한 궁극의 피해자는 바로 자신이 선택한 등반을 스스로 부정한 등반가 자신이다. 자기 발걸음을 속이고 저만치 선 정상을 택함으로써, 다시 오지 않을 삶이 충만해질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게 거짓의 죗값이다. <죄와 벌>의 문장을 빌자면 '자신을 죽이고 팔아먹었으니 당신은 죄인'이다. 알맹이 빠진 껍데기 등반이었음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 이 사실에 힘겨워할 줄 모른다면, 그가 알고 체험한 등반의 크기가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⑨ 껍데기 아닌 등반의 '알맹이'를 어떻게 추구할 수 있을까?
등반의 '알맹이'가 무엇인지는 그걸 자기 삶의 기준으로 삼아 온 등반가에게는 자명하다. 그걸 대하듯 뭇 등산가들의 산행을 대하면 된다. 도덕률로 단죄하기 이전에, 사회 분위기, 주변에의 의무감, 내면의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등반가의 주관을 날것 그대로 들여다보면 된다. 그럴 때 비로소 저마다 추구해 온 등반의 '알맹이'도 드러난다.
신뢰와 공감이야말로 산행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우리'와 '저들' 사이의 편 가르기가 아니라, 영웅을 향한 맹목적인 추앙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대등하고 온전한 신뢰와 공감이야말로 그에게서 자신의 산을 발견하고 되새기도록 해준다. 그럴 때 자기 마음속 정상에 대한 욕구를 비로소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바로 거기가 출발점이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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