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끝에 2차관 인선…내부 발탁에 과기정통부 '안도의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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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삼유여민 작성일22-06-04 02:31 조회7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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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규 과기정통부 2차관 발탁…ICT 분야 '정통 관료''ICT 홀대론' 딛고 차관 인사 마무리…후속 인사 단행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코로나19 중대본 회의에 앞서 통화를 하고 있다. 2022.6.3/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서울=뉴스1) 박정양 기자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ICT)으로 박윤규 정보통신정책실장이 발탁됨에 따라 지난달 10일 이종호 장관 임명 이후 한달여만에 차관급인 1,2차관과 본부장 인선이 마무리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박윤규 과기정통부 신임 2차관을 비롯해 정부 부처 차관급 인사를 단행했다. 행정고시 37회로 공직에 입문한 박 신임 차관은 ICT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관료로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법학 석사를 받았다.과기정통부 전신인 정보통신부 출신으로 방송통신위원회 방송채널정책과장, 주미합중국대사관 참사관, 미래창조과학부 인터넷융합정책관·정책총괄과장, 국가안보실 사이버안보비서관실 선임행정관, 과기정통부 전파정책국장, 정보통신정책관, 정보통신정책실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사무관 시절부터 ICT 분야를 담당하며 관련 전문성을 쌓아 내부적으로 리더십과 전문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번 인사는 지난 13일 오태석 1차관(과학기술)과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임명된 이후 20여일 만에 발표됐다. 과기정통부는 차관 3명 중 유독 2차관 인사만 발표되지 않아 'ICT 홀대론'까지 불거졌다. 내부 승진이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일각에서 기재부, 학계 등 외부 출신 영입설에 힘이 실리면서 뒤숭숭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2차관 인사가 미뤄지면서 5G 중간요금제 도입과 주파수 추가 할당 문제 등 각종 ICT 현안 처리가 사실상 올스톱됐다. 이종호 장관마저 지난달 30일 기자들을 만나 "제가 제일 속이 탄다"며 2차과 인사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갑갑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에 박윤규 과기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을 내정했다. (대통령실 제공) 2022.6.3/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ICT홀대론도 극에 달했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 밑그림을 그릴 인수위 구성 초반때도 과기정통부 2차관실 관료들만 인수위 참여가 배제된 데 이어 유독 2차관 인선만 3주 가까이 늦어진 탓이다. 과기정통부 내부에서는 "ICT홀대론은 팩트"라고 말할 정도로 뒤숭숭한 분위기가 계속됐다.결국 2차관실의 최대 현안 중 하나인 주파수 추가 할당 문제도 2차관 없이 진행됐다. 과기정통부 홍진배 네트워크 정책실장과 최우혁 전파정책국장은 2일 정부서울청사에 브리핑을 통해 LG유플러스가 지난해 7월 5G 품질 개선을 위해 추가 할당을 신청한 3.4~3.42㎓ 대역(20㎒ 폭) 5G 주파수에 대한 할당계획(1521억원)을 공고했다. 2차관이 없기 때문에 네트워크 실장과 전파정책국장이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고 주파수 현안을 처리한 것으로 전해졌다.기다리던 2차관 인사가 마침내 발표된 만큼 과기정통부는 쌓인 현안 처리를 속도를 내는 것은 물론 차관급 인사로 공석이 된 자리에 대한 후속 인사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차관발탁으로 실장급 두 자리가 공석"이라며 "이를 채우는 후속인사가 연쇄적으로 단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코로나19 중대본 회의에 앞서 통화를 하고 있다. 2022.6.3/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서울=뉴스1) 박정양 기자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ICT)으로 박윤규 정보통신정책실장이 발탁됨에 따라 지난달 10일 이종호 장관 임명 이후 한달여만에 차관급인 1,2차관과 본부장 인선이 마무리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박윤규 과기정통부 신임 2차관을 비롯해 정부 부처 차관급 인사를 단행했다. 행정고시 37회로 공직에 입문한 박 신임 차관은 ICT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관료로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법학 석사를 받았다.과기정통부 전신인 정보통신부 출신으로 방송통신위원회 방송채널정책과장, 주미합중국대사관 참사관, 미래창조과학부 인터넷융합정책관·정책총괄과장, 국가안보실 사이버안보비서관실 선임행정관, 과기정통부 전파정책국장, 정보통신정책관, 정보통신정책실장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사무관 시절부터 ICT 분야를 담당하며 관련 전문성을 쌓아 내부적으로 리더십과 전문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번 인사는 지난 13일 오태석 1차관(과학기술)과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임명된 이후 20여일 만에 발표됐다. 과기정통부는 차관 3명 중 유독 2차관 인사만 발표되지 않아 'ICT 홀대론'까지 불거졌다. 내부 승진이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일각에서 기재부, 학계 등 외부 출신 영입설에 힘이 실리면서 뒤숭숭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2차관 인사가 미뤄지면서 5G 중간요금제 도입과 주파수 추가 할당 문제 등 각종 ICT 현안 처리가 사실상 올스톱됐다. 이종호 장관마저 지난달 30일 기자들을 만나 "제가 제일 속이 탄다"며 2차과 인사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갑갑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에 박윤규 과기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을 내정했다. (대통령실 제공) 2022.6.3/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ICT홀대론도 극에 달했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 밑그림을 그릴 인수위 구성 초반때도 과기정통부 2차관실 관료들만 인수위 참여가 배제된 데 이어 유독 2차관 인선만 3주 가까이 늦어진 탓이다. 과기정통부 내부에서는 "ICT홀대론은 팩트"라고 말할 정도로 뒤숭숭한 분위기가 계속됐다.결국 2차관실의 최대 현안 중 하나인 주파수 추가 할당 문제도 2차관 없이 진행됐다. 과기정통부 홍진배 네트워크 정책실장과 최우혁 전파정책국장은 2일 정부서울청사에 브리핑을 통해 LG유플러스가 지난해 7월 5G 품질 개선을 위해 추가 할당을 신청한 3.4~3.42㎓ 대역(20㎒ 폭) 5G 주파수에 대한 할당계획(1521억원)을 공고했다. 2차관이 없기 때문에 네트워크 실장과 전파정책국장이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고 주파수 현안을 처리한 것으로 전해졌다.기다리던 2차관 인사가 마침내 발표된 만큼 과기정통부는 쌓인 현안 처리를 속도를 내는 것은 물론 차관급 인사로 공석이 된 자리에 대한 후속 인사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차관발탁으로 실장급 두 자리가 공석"이라며 "이를 채우는 후속인사가 연쇄적으로 단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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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앨런 미카일은 오스만제국 제9대 술탄 셀림의 행로를 치밀하게 추적해 오스만제국이야말로 서구 근대문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셀림 통치 당시의 오스만제국 지도와 셀림과 그의 군사들이 주변 강국들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 책과함께 제공술탄 셀림/앨런 미카일/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3만8000원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제7대 술탄 메흐메트 2세와 군사들이 사거리 1㎞가 넘는 대포를 앞세워 서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면서 자신들이 새 로마제국임을 선언했다. 튀르크어파 소수 유목민에서 출발한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이주한 뒤 13세기 소규모 공국으로 성장했고 지도자 오스만의 영도를 따라 세력을 키워왔다.오스만제국은 이후 1800년대까지 거의 4세기 동안 오늘날 33개국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면서 세계의 정치, 경제, 전쟁 중심지로 군림했다. 제국의 술탄 36명 중 가장 영향력이 큰 통치자였고, 제국 영토를 이전 술탄보다 무려 세 배나 확장시켜 오스만제국을 세계적 강국으로 변모시킨 사람이 바로 제9대 술탄 셀림이었다.
앨런 미카일/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3만8000원셀림은 1470년 아나톨리아의 작은 도시 아마시아 황궁에서 왕자 바예지트와 노예 출신 네 번째 첩 귈바하르 사이에서 열 명의 왕자 중 네 번째 왕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바예지트가 1481년 직업군인 집단 예니체리 도움을 받아서 메흐메트 뒤를 이어 제8대 술탄이 되자, 셀림은 10명 왕자 중 배다른 형제인 교활하고 정치적인 아흐메드와, 사색을 즐기는 독서가 코르쿠드와 후계를 다투게 된다.셀림은 17세 때 흑해에 면해 있는 동쪽 오지인 트라브존 총독으로 임명돼 어머니 궐바하르의 도움을 받아 트라브존을 통치했다. 그는 이때 “병력 없이 권력 없고/ 자금 없이 병력 없고/ 번영 없이 자금 없고/ 정의와 훌륭한 행정 없이 번영 없다”는 제국의 전통 통치술 ‘정의의 원’을 바탕으로 상업과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대를 육성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오스만제국 동쪽에 위치해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하는 시아파 사파비왕국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아버지 술탄 바예지트와 셀림 간 의견차가 노정되면서 권력투쟁이 본격화한다. 셀림은 급기야 1508년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사파비왕국의 동맹국 게오르기아(현재의 조지아)를 선제 침공해 승리했다.“부왕의 왕궁에 있는 무능한 자들, 날치기들, 부와 소유물에 욕심을 내는 자들은 그들의 탐욕 신에게 선물을 주고 그 신을 섬긴다… 우리 왕궁의 진정한 노예는 충성스럽게 헌신하고, 제국의 대의에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우리에게 동료애와 봉사를 제공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고하신 신을 찬미하라! 그분께서 나를 노예로 삼아 군주의 권력을 주신다면 내 인정 많은 관심은 자유민을 향할 것이다. 내 호의는 유능하고 뛰어난 칼 든 전사에게로 향할 것이다.”(378쪽)
셀림은 마치 조선 태종이 일으킨 ‘왕자의 난’처럼 군사를 일으켜 제위를 차지했다. 이스탄불 근교에서 아버지 군대에게 패해 물러났지만 예니체리와 지지자들을 움직여 이스탄불 내에서 지지 시위를 조직해 제위를 아흐메드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듬해 예니체리와 지지자들을 이끌고 왕궁을 장악하고 아버지를 폐위시킨 뒤 제9대 술탄에 등극했다.제위에 오른 셀림은 1514년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사파비왕국을 침공해 찰디란 전투에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대승을 거뒀다. 2년 뒤에는 중동으로 진출해 맘루크왕국 군대를 격파한 뒤 남하해 카이로에 입성하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맘루크왕국은 이때 사실상 멸망했다.셀림은 이 과정에서 카이로처럼 강하게 저항하는 도시는 약탈을 허용해 저항하면 응징한다는 선례로 제국의 위엄을 보였다. 하지만 대다수 피정복지에 고유의 사회구조, 재산, 문화를 유지하도록 하는 한편 유대교를 비롯해 종교적 다양성을 용인해 지지를 이끌어냈다. 포용과 다양성 정책을 통해 400년 제국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아울러 정복지 예멘에서 자라던 커피를 제국 네트워크를 이용해 글로벌 상품으로 만들어 부를 키웠고 폴란드와 헝가리 등과는 새 평화협정을 맺어 공존을 모색했다.강대국이 되는 기틀을 다진 셀림은 1520년 49세에 사망했다. 셀림의 뒤를 이은 이는 오스만제국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장엄왕 술레이만이었다.세계적인 중동사 연구자로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책에서 오스만제국을 두려운 강대국으로 만든 ‘정복왕’ 제9대 술탄 셀림 1세의 행로와 치적을 치밀하게 추적하는 한편, 그가 이룬 제국의 세계사적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저자는 이를 통해 이슬람문명과 오스만제국이야말로 서구 문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한다. 즉, 오스만제국이 지중해 세력권을 확보해 동방 무역로를 독점하면서 서유럽은 대서양 항로와 인도양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포용과 다양성 정책으로 유럽에서 종교개혁도 벌어졌다는 것이다. 발달된 기술과 경제, 정치적 민주 제도를 바탕으로 서구 우위의 세계사가 전개됐다는 기존 서구 중심적 사관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볼온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책은 ‘인디펜던트 퍼블리셔 도서상’을 수상했다.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앨런 미카일은 오스만제국 제9대 술탄 셀림의 행로를 치밀하게 추적해 오스만제국이야말로 서구 근대문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셀림 통치 당시의 오스만제국 지도와 셀림과 그의 군사들이 주변 강국들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 책과함께 제공술탄 셀림/앨런 미카일/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3만8000원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제7대 술탄 메흐메트 2세와 군사들이 사거리 1㎞가 넘는 대포를 앞세워 서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면서 자신들이 새 로마제국임을 선언했다. 튀르크어파 소수 유목민에서 출발한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이주한 뒤 13세기 소규모 공국으로 성장했고 지도자 오스만의 영도를 따라 세력을 키워왔다.오스만제국은 이후 1800년대까지 거의 4세기 동안 오늘날 33개국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면서 세계의 정치, 경제, 전쟁 중심지로 군림했다. 제국의 술탄 36명 중 가장 영향력이 큰 통치자였고, 제국 영토를 이전 술탄보다 무려 세 배나 확장시켜 오스만제국을 세계적 강국으로 변모시킨 사람이 바로 제9대 술탄 셀림이었다.
앨런 미카일/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3만8000원셀림은 1470년 아나톨리아의 작은 도시 아마시아 황궁에서 왕자 바예지트와 노예 출신 네 번째 첩 귈바하르 사이에서 열 명의 왕자 중 네 번째 왕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바예지트가 1481년 직업군인 집단 예니체리 도움을 받아서 메흐메트 뒤를 이어 제8대 술탄이 되자, 셀림은 10명 왕자 중 배다른 형제인 교활하고 정치적인 아흐메드와, 사색을 즐기는 독서가 코르쿠드와 후계를 다투게 된다.셀림은 17세 때 흑해에 면해 있는 동쪽 오지인 트라브존 총독으로 임명돼 어머니 궐바하르의 도움을 받아 트라브존을 통치했다. 그는 이때 “병력 없이 권력 없고/ 자금 없이 병력 없고/ 번영 없이 자금 없고/ 정의와 훌륭한 행정 없이 번영 없다”는 제국의 전통 통치술 ‘정의의 원’을 바탕으로 상업과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대를 육성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오스만제국 동쪽에 위치해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하는 시아파 사파비왕국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아버지 술탄 바예지트와 셀림 간 의견차가 노정되면서 권력투쟁이 본격화한다. 셀림은 급기야 1508년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사파비왕국의 동맹국 게오르기아(현재의 조지아)를 선제 침공해 승리했다.“부왕의 왕궁에 있는 무능한 자들, 날치기들, 부와 소유물에 욕심을 내는 자들은 그들의 탐욕 신에게 선물을 주고 그 신을 섬긴다… 우리 왕궁의 진정한 노예는 충성스럽게 헌신하고, 제국의 대의에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우리에게 동료애와 봉사를 제공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고하신 신을 찬미하라! 그분께서 나를 노예로 삼아 군주의 권력을 주신다면 내 인정 많은 관심은 자유민을 향할 것이다. 내 호의는 유능하고 뛰어난 칼 든 전사에게로 향할 것이다.”(378쪽)
셀림은 마치 조선 태종이 일으킨 ‘왕자의 난’처럼 군사를 일으켜 제위를 차지했다. 이스탄불 근교에서 아버지 군대에게 패해 물러났지만 예니체리와 지지자들을 움직여 이스탄불 내에서 지지 시위를 조직해 제위를 아흐메드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듬해 예니체리와 지지자들을 이끌고 왕궁을 장악하고 아버지를 폐위시킨 뒤 제9대 술탄에 등극했다.제위에 오른 셀림은 1514년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사파비왕국을 침공해 찰디란 전투에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대승을 거뒀다. 2년 뒤에는 중동으로 진출해 맘루크왕국 군대를 격파한 뒤 남하해 카이로에 입성하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맘루크왕국은 이때 사실상 멸망했다.셀림은 이 과정에서 카이로처럼 강하게 저항하는 도시는 약탈을 허용해 저항하면 응징한다는 선례로 제국의 위엄을 보였다. 하지만 대다수 피정복지에 고유의 사회구조, 재산, 문화를 유지하도록 하는 한편 유대교를 비롯해 종교적 다양성을 용인해 지지를 이끌어냈다. 포용과 다양성 정책을 통해 400년 제국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아울러 정복지 예멘에서 자라던 커피를 제국 네트워크를 이용해 글로벌 상품으로 만들어 부를 키웠고 폴란드와 헝가리 등과는 새 평화협정을 맺어 공존을 모색했다.강대국이 되는 기틀을 다진 셀림은 1520년 49세에 사망했다. 셀림의 뒤를 이은 이는 오스만제국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장엄왕 술레이만이었다.세계적인 중동사 연구자로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책에서 오스만제국을 두려운 강대국으로 만든 ‘정복왕’ 제9대 술탄 셀림 1세의 행로와 치적을 치밀하게 추적하는 한편, 그가 이룬 제국의 세계사적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다.저자는 이를 통해 이슬람문명과 오스만제국이야말로 서구 문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한다. 즉, 오스만제국이 지중해 세력권을 확보해 동방 무역로를 독점하면서 서유럽은 대서양 항로와 인도양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포용과 다양성 정책으로 유럽에서 종교개혁도 벌어졌다는 것이다. 발달된 기술과 경제, 정치적 민주 제도를 바탕으로 서구 우위의 세계사가 전개됐다는 기존 서구 중심적 사관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볼온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책은 ‘인디펜던트 퍼블리셔 도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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